문화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문화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버밍햄 학파와 스튜어트 홀의 문화 연구
김윤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사회학 교수
버밍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소는 1960년대 이후 문화에 관한 연구를 새로운 학문 분과로 정립하면서 영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광범한 지적 영향을 미쳤다. 1964년 리처드 호가트가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했으며, 곧 이어 스튜어트 홀이 소장을 맡았다. ‘버밍햄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비해 훨씬 경험적 분석에 집중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리처드 호가트, 폴 윌리스, 스튜어트 홀 등은 대중매체, 교육, 스포츠,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적 연구를 발표했다. 동시에 텍스트와 맥락, 수용자, 민속지학,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소위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이끌었다.
계급 문화의 실종
버밍햄 학파의 선구적 연구는 1951년 출간된 리처드 호가트의 <교양의 효용>을 꼽을 수 있다. 북 잉글랜드의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호가트는 전후 영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계급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전통적인 형태의 계급 문화는 천박한 형태의 무계급문화, 또는 ‘정체불명의’ 문화로 변화되었다.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이 일종의 문화적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일정 수준 스스로 동의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떻게 노동자계급이 대중매체에 의해 더욱 순응적 태도를 갖게 되는지 분석했다.
“오늘날의 대중에게는 ‘그냥 순응하면 된다’라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다. 어쨌든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은 없고, 다수의 의견이 맞을 테니 당신은 그들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그냥 믿으면 된다.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삶의 법칙에 대한 일종의 죄이다” - 리처드 호가트, <교양의 효용>, 1951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의 보통교육이 독서 수준의 향상에 기여했는지 의심했다. 오히려 질 낮은 대중매체로 인해 읽기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보았다. 노동자계급이 즐겨 읽는 <선(Sun)> 등 타블로이드 신문은 2면에 여자의 몸을 보여주는 선정적 사진과 유명인의 스캔들 기사로 유명한데, 이는 대량생산 시대의 대중매체의 보편적 특징이다. 호가트는 이런 대중매체의 흐름이 사회의 억압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억압에 복종하는 문화를 만든다고 보았다. 이런 복종은 전통 사회보다 강력하며, “문화적 종속의 사슬이 경제적 종속보다 걸치기는 쉽지만 끊어버리기는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정적인 것만 접하면 수용자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개방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된다. 노동자계급은 바깥세상의 일에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채로 즉각적 자극에만 반응하고, 결국 “영혼은 굳게 닫히고, 자기 내면에 침잠한 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쇼와 간접적인 자극으로 구성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호가트는 중앙집권화와 급속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거대한 무계급화의 흐름이 생겨나면서 노동자계급이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고 슬픈 어조로 지적했다. 호가트의 분석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전후 유럽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지적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서막으로도 볼 수 있다.
'68 혁명'과 문화 연구
1968년 학생운동이 폭발하고 신좌파 운동의 등장하면서 문화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관심이 급증했다 전 세계를 뒤흔든 ‘68 혁명’은 기성 사회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시도했으며, 정치적 급진주의와 문화적 다원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마오쩌뚱과 체 게바라의 사진을 앞세운 학생 혁명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반권위주의, 자유연애, 혼전동거, 남녀평등, 동성애 허용으로 상징하는 대안적 생활방식을 추구했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사회 혁명보다 개인 혁명을 더 앞세웠다. 혁명적 열기는 정치와 경제 체제의 전환보다 문화 혁명을 추구했다.
미국에서 히피(hippie)로 상징되는 반문화(counter culture)는 기성 세대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긴 머리, 청바지, 락큰롤, 마리화나는 저항과 젊은이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1960년대 중국에서는 붉은색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든 학생들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이 폭발하면서 중국 사회를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세익스피어가 글로브 극장에서 <리처드 2세>를 상연하는 것이 정치적 의도로 보인 것처럼, 마오쩌뚱의 시대에 북경에서 오함의 연극 <해서파관>은 문화대혁명 5인조의 등장에 직면했다.
유럽과 북미의 68 혁명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문화와 정치의 거대한 융합을 만들었으며, 그 후 문화의 정치화에 대한 지적 관심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문학과 미학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새로운 논쟁을 이끌었고, 모든 문화는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학에서도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불릴 만큼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대중문화, 예술, 미디어, 젠더, 몸, 섹슈얼리티,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가 학문적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소개한 미국 사회학자 제프리 알렉산더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학 연구는 '문화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에 대한 관심을 확대했다. 이들의 연구는 전통적인 탤코트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문화의 자율적 역할에 탐구하는 동시에 학제적 연구를 활용하여 문화사회학의 영역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사회학에서 문화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이미 영국 버밍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소가 '문화 연구'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다. 스튜어트 홀, 폴 윌리스, 딕 헤브디지 등 학자들의 텍스트, 맥락, 수용자, 민속지학,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는 문화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학교와 계급 재생산
버밍햄 대학의 문화 연구는 새로운 역사적인 연구를 탄생시켰다. 캠브리지 대학과 버밍엄 대학에서 공부한 영국 사회학자 폴 월리스는 1978년 <학교와 계급 재생산>(Learning to Labour)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이 어떻게 문화적 경험으로 구성되는지 분석했다. 그는 영국 중부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는 노동자계급의 아이들 12명의 '저항 문화'(culture of resistance)에 대한 심층 인터뷰로 수행하고 민속지를 활용했다.
노동자계급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돈과 명성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교육 과정에 관심이 없다. 노동자계급 자녀들의 비공식 또래집단은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규범과 질서를 깨뜨리는 움직임으로 하나의 세력을 만든다. “반학교 집단(anti school group)”은 학교와 공식적 제도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공부, 실력, 자격, 성실한 태도는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정신노동을 경멸하고 육체노동을 좋아한다. 정신노동은 ‘계집애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고 육체노동이야말로 ‘사나이(lad)’다운 힘과 경험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그들의 문화는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적 특성을 가진다. 노동자계급 자녀들은 일탈, 반항, 저항의 문화를 만들고, 담배를 피우고,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져야 ‘사나이다운’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교 교사의 권위를 따르지 않고, 순응하는 학생들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일탈을 고자질하지 않으며 정체성과 연대성을 강화한다.
영국 노동자계급 청소년들은 공식적 학교 교육을 거부하면서 중간계급으로의 상향 이동을 포기하고 대부분 부모의 대를 이어 육체노동자의 길을 선택한다. 영국의 보편적 무상 공교육은 전혀 노동자계급의 상향 이동에 기여하지 못한다. 노동자계급의 청소년 또래집단이 만든 왜곡된 계급의식과 반항 문화는 결국 그들의 미래를 육체노동자로 이끌어 철저히 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질서와 계급 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저항 문화'의 아이러니(irony)가 발생한다.
스튜어트 홀의 문화 연구
리처드 호가트의 뒤를 이어 버밍햄 대학 현대문화연구소 소장이 된 스튜어트 홀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의 개념을 활용하여 영국 정치와 문화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도했다. 홀의 분석에 따르면, 1979년 마가렛 대처 보수당 총리의 집권은 단지 정권 교체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의 급진적 재구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의 출발이다. 대처가 추진한 경제 자유화, 공기업의 매각, 금융시장의 빅뱅, 탈규제, 감세, 복지 축소는 단순한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문화적 변동을 수반했다. 스튜어트 홀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를 ‘대처주의’(Thatcherism)라고 정의하며, 모든 문화적 변동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관련을 가진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스튜어트 홀은 미디어 효과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논쟁도 제기했다. 전통적인 미디어 수용자 이론은 일반적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자 폴 라자스펠드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전통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포스트구조주의적 연구 및 포스트모던 연구 등 세 가지의 이론적 조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실증주의, 과학주의적 전통을 강했다. 예를 들어, 유권자들이 선거 관련 방송을 보고 투표 행위가 변화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미디어로 인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영국의 버밍햄 학파의 문화 연구의 관점은 미디어의 수용자가 가지는 의미의 자율적 해독 능력을 강조했다. 문화 연구는 태도나 신념이라는 단어보다는 코드(code)라는 개념이 사용하며, 코드가 해석되는 방식에 주목했다. 스튜어트 홀은 미디어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프랑스의 기호학적, 구조주의적 관점을 종합하려고 시도했다.
1973년 스튜어트 홀은 ‘텔레비전 담론의 부호화와 해독’ 제목의 글에서 인코딩/디코딩(Encoding/Decoding) 모델을 제시했다. 이 글은 1980년 <문화, 미디어, 문화』> 학술지에 출간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홀은 ‘발신자-메시지-수신자‘라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모형 이론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고 비판했다. 메시지가 발신자에서 수신자에게 송신되었다 해서 그것이 그대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메시지가 생산된 이후 수용자에 의해 이해되는 과정은 텔레비전 속의 이미지, 미디어의 담론, 텔레비전 뉴스의 화면 구성,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술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중층적으로 결정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미디어 제작자의 의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기술적 고려를 통해 구체화되지만, 결국 시청자들이 이해하는 일상적 메시지로 변형되는 부호화(encoding)를 거친다.
스튜어트 홀은 부호 생산자가 의도한 의미와 해독자가 받아들인 의미 사이에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제한적이나마 개방적으로 기호의 다의적 가치를 활용해 해독자가 기호를 능동적으로 변형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텍스트를 해독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만든다. 홀은 해독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생산자의 의도대로 수용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적 독해, 생산자의 메시지에 담긴 지배적 코드를 거부하는 저항적 독해, 지배적 독해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욕구와 자각에 맞추어 변형하는 타협적 독해로 분류한다. 홀의 부호화-해독 모델은 생산, 텍스트, 수용자의 관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스튜어트 홀은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모델, 미학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대중문화의 수동적인 소비자로서의 수용자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적 생산과 수용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 분석에서 나타나는 비관적 관점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상대주의적 관점과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저명한 영국 출신 미국 미디어 학자 존 피스크도 대중문화의 신화에 반대하며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이 독자적으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생산물'인 대중문화와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민중문화'(popular culture)를 구별했다. 피스크는 <민중문화 이해하기>에서 사람들이 대중문화가 만든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사용하고, 남용하고, 전복하면서 새롭게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는 능동적 존재라고 강조한다.
문화와 정치
영국의 문화 연구, 프랑스의 구조주의, 미국의 문화사회학은 매우 다른 지적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세 가지 상이한 접근법의 차이는 문화와 정치에 대한 해석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미국의 기능주의적 문화사회학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문화에서 정치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배제한다. 자율적인 문화 구조, 언어의 놀이 또는 이미지의 시뮬라시옹이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문화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모든 문화의 형성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며, 언어와 이미지도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통해 표현된다.
버밍햄 학파의 중요한 지적 공헌은 문화의 다양한 유형은 단지 개인의 선호와 취향으로 결정되거나 시장에서의 공급과 소비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권력 관계와 정치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는 국가, 기업, 미디어, 문화산업, 예술가, 유명인사 등이 광범위하게 관여하면서 상이한 이익과 전략이 충돌하고 서로 결합된다. 이런 점에서 현대 문화의 형성은 많은 경우 정치적 프로젝트로 기획되며,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문화적 내용과 형식이 결정된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 정치’라는 개념은 문화와 정치가 명백하게 분리될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한다. 문화 정치는 사람의 태도, 견해, 신념, 관점, 미디어, 예술로 표현되는 문화가 사회와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고, 사회경제적, 법률적 실재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행위는 개인의 일탈 행위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젠더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고, 미투 운동을 확산시키고,‘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재판부의 판결문에 등장하는 현실을 초래했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와 정치를 분리하여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사회의 지식, 담론, 이데올로기, 도덕, 규범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예술과 대중문화도 정치와 권력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된다. 전통 사회의 군주와 교회에서 현대 사회의 정부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지배세력은 예술과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활용하려고 시도한다.
예술과 대중문화가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정치적인 주장이다. 그런 주장이야말로 사회의 기득권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과 대중문화도 정치권력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문화는 정치권력에 협력하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정치권력과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문화의 모든 과정에서 정치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적 논의를 촉발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연구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 분석이다. 이는 다음 글에서 살펴볼 것이다.
김윤태
고려대학교 공공정책대학 사회학 교수이다. 영국 캠브리지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저서로 <모두를 위한 사회과학>, <정치사회학>, <문화사회학의 이해>(공저)를 출간했다. yunkim@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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